해외여행

블라디보스토크 여행(2)

방윤창 2016. 12. 21. 16:03

3일차
21016년 12월 18일

 

호텔앞의 바닷가 얼음으로 꽁꽁

 

해양공원으로

 

 

 

 

 

 

 

 

 

 

 

 

젊음과 문화의 상징 아르바트거리

이른아침이라서 조용합니다

 

 

재래시장

 

 

 

 

 

블라디보스토크 기차역

시베리아횡단 철도의 시작이자 끝

 

 

 

시베리아 횡단열차 승자전에 길 건너편에 있는 레닌동상이 있는 공원

 

공원에서 본 블라디보스크트 기차역

 

기차역 천장의 그림

윗부분이 모스크바 아랫부분이 블로디보스크트

 

내부는 우리나라 시골역 풍경

 

우리들이 타고 갈 모스크바로 가는 열차

 

 

 

 

모스크바까지 9288km의 기념탑

세계에서 가장 큰나라 모스크바랑 시간차가 7시간이랍니다

 

 

 

기차를 타고 가면서 본 바깥 풍경

 

 

 

 

러시아 아가 굳이 외손녀하고 같이 앉고 싶어하네요

 

 

 

 

 

 

 

 

 

 

 

 

 

 

 

40분 정도 시베리아 횡단 열차 체험을하고 우골나야 기차역에서 하차

 

우리나라 시골역 같은 분위기인 우골나야역

 

버스를 타고 우스리스크로 이동 하면서 본 풍경

1시간10분 정도 가면서 주유소만 2개정도이고 아래와같은 허허 벌판

 

 

 

 

 

 

 

1시간10분 정도 버스를  타고 우스리스크에 도착후 중식당에서 점심 식사

 

식당앞에 운동장에 스케이트장을 만들어서 스케이팅을 하고있네요

 

 

이상설선생 유허비

1917년 3월2일 이곳 연해주에서 48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난 독립운동가 이상설 선생은 동지들에게 조국 독립을 보지 못하고 세상을 떠나는 자신을 이곳 우스리스크 수이푼강가에서 화장하여 강물에 뿌려달라는 유언을 남기고 죽는다.

자신이 연구하고 모든자료와 물품들을 함께 태워 현재가지 선생의 업적을 연구하는데 난항을 겪고있다

훗날 선생을 추모하는 광복회와 고려학술문화재단에서 2001년 10월18일 러시아 정부와의 협조를 통해 너른 벌판에 비석하나만 덩그러니 이곳에 비석을 세웠다

 

 

비석 앞에 수이푼강

 

 

 

최재형 선생 생가

1858년 함경북도 경원에서 출생한 최재형은 1869년 아버지 최흥백, 형 알렉세이와 함께 연해주 남부 진신허 마을로 이주했다. 1871년 집을 나와 전전하다가 포시에트 선착장에서 러시아 선원들에게 발탁되어, 러시아 함대의 견습수부가 되었다. 그후 그는 1878년부터는 블라디보스톡에 있는 무역회사에서, 1882년에는 블라디보스톡-라즈돌노예-슬라뱐카-노보키예프스크-크라스노예 셀로를 잇는 전략도로 건설부에서 통역원으로도 일하며 많은 인생 경험을 쌓아나갔다.

이후 최재형은 군수업으로 막대한 부를 쌓았다. 최재형은 한국인들을 직원으로 고용했는데, 이로 인해 절대빈곤에 시달리던 한국인들은 자신들의 힘으로 돈을 벌 수 있었다. 최재형은 러시아 연해주 연추에서 활동하였는데, 한국인들의 경제적 자립에 기여한 덕분에 연추의 한국인 사회에서 도헌(군수 정도 되는 공직)에 선출될 정도로 러시아 사회에서의 위치가 높아졌다. 1893년 최재형은 얀치헤(연추) 한인 마을의 책임자(읍장)로 선출되면서 그는 마을에 학교와 교회를 세우는 등, 지역 한인들로부터 높은 신뢰와 덕망을 쌓아나갔으며, 1896년에는 페트로그라드에서 열린 니콜라이 2세의 대관식에 참석하기도 했다.

을사조약 체결로 조선의 국운이 위태롭던 시기, 1906년 최재형은 연해주 남부에서 최초의 의병부대를 조직했다. 그는 의병부대를 직접 지휘하거나, 이범윤 등과 연합하여 무장투쟁을 전개했으며, 1909년에는 전 조선총독 이토 히로부미 암살계획에 참여하기도 했다. 1911년 5월 21일 57명의 주요 항일인사들로 구성된 블라디보스톡 비밀회의에서 애국단체『권업회』가 조직되었다. 최재형은 권업회의 초대 회장으로 선출되어 활발한 항일운동을 전개해 나갔으며, 한때 일본 스파이 혐의로 체포되었다가 나흘 후 방면되는 고초를 겪기도 했다.

최재형의 적극적이고 활발한 항일활동 배후에는 한인들의 아낌없는 지지와 신뢰가 바탕이 되었다. 1913년 최재형은 7명으로 구성된 사절단을 이끌고 페트로그라드의 로마노프 왕조 300주년 기념식에 참석했으며, 1914년 1월에는 블라디보스톡에서 열린 한인의 러시아 이주 50주년 기념 행사준비위원장으로 선출되기도 했다. 하지만 1915년 슬라뱐카 마을에서 헌병에게 재차 체포되어 니콜스크-우수리스크(현재 우수리스크)로 이송되었다가 여론의 압력으로 11일 후 석방되는 등, 또 한번의 고초를 겪기도 했다.

1917년 최재형은 이번에는 얀치헤 집행위원회 대표로, 1919년에는 상해 임시정부 재무부 장관으로 선출되기도 했다. 1918-1920년 내전시기 동안에는 새로운 빨치산 부대를 조직하여 백위파를 지원하는 일본군에 타격을 주었고, 이로 인해서 최재형은 일제의 주요 감시의 대상이 되었다. 1920년 4월 5일 새벽 최재형은 일본군에 의해 블라디보스톡과 우수리스크 등지에서 동시다발적으로 감행된 학살만행 과정에서 체포되어 처형되었다.

최재형은 자신의 모든 재산을 항일운동을 위해 대부분 사용하였다. 연해주에 온 의병들을 옛 소비에트연방이 제2차 세계대전때까지 사용할 정도로 성능이 뛰어난 소총으로 무장시키기도 했으며, 러시아의 모든 항일 의병 세력을 단결시킨 동의회를 결성하는데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

또한 그는 안중근의사의 의거를 지원한 인물이다.『대동공보』를 발행, 항일의식을 고취시키던 최재형에게 안중근의사가 찾아온다. 최재형은 안중근 의사의 이토 히로부미 사살장소를 하얼빈으로 정해, 일본이 아닌 러시아 법정에서 재판을 받도록 조치하고, 변호사인 미하일로프 주필을 안중근의 변호인으로 준비한다. 하지만 안중근 의사가 1910년 일본 법정에서 재판을 받고 처형되자, 최재형은 안중근 의사를 지켜주지 못했다고 자책감을 느껴 안중근 의사의 부인과 아이들을 보호하였다.

이후 연해주의 한인들에 대한 러시아의 감시가 강화되었고, 권업회를 창설하여 독립운동을 하던 최재형도 그를 간첩으로 몬 일본의 음모로 체포되었다. 곧 무혐의 결정으로 석방되었으나, 러시아정부에서 더 이상 그와 상거래를 하지 않음에 따라 경제적 궁핍에 시달려야 했다. 최재형은 1920년 러시아의 일본인들을 보호한다는 명분으로 연해주에 침입한 일본군에 의해 총살당하고 말았다. 현재 최재형의 후손들이 러시아 모스크바와 카자흐스탄 알마티 등지에서 거주하고 있으며, 1962년 최재형의 후손에게 대한민국 정부로부터『건국훈장』이 추서되었다.

 

 

전로한족회 중앙총회 개최장소

1917년 러시아혁명 발발 이후 러시아 전체 지역에 거주하고 있는 한인들의 대표자회의로서 1919년 블라디보스토크에 세워졌던 임시정부 성격의 단체

 

 

거북이 공원

거북이는 없고 어린이공원

 

 

 

 

 

고려인 문화 센타

공사중이라서 관람을 못하고 나옵니다

 

 

 

1시간40분 버스로 이동후 공항에 도착

 

오후8시30분 블라디보스토크 출발

블라보스토크 야경

 

 

 

 

 

 

대한민국  야경

 

 

오후9시40분 인천공항도착 대전가는 버스표 매진되어 콜벤으로 이동

2박3일 블라디보스토크 여정을 마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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